[스크랩] 똑같은 눈빛은 없다던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여사를 추억함.
두 번은 없다.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다.
우리는 연습없이 태어나서 실습없이 죽는다.
인생이란 학교에서 꼴찌를 해도
여름이든 겨울이든 낙제는 안준다.
반복되는 하루도 단 한번도 없다.
똑같은 밤(夜)도 없다.
똑같은 입맞춤도 없고
똑같은 눈빛도 없다...
- 쉼보르스카님의 詩 <두번은 없다>중에서
영화 <오른쪽으로 가는 남자, 왼쪽으로 가는 여자>나 드라마<김삼순>에서도 쉼보르스카여사의 시가 종종 언급되었지요. 시어들이 참 쉬운데, 읽다보면 그 반짝이는 유머감각속에 깊은 내면과 관조적인 강인함이 느껴져요.
선택의 가능성 by 비슬라바 쉼보르스카
영화를 더 좋아한다.
고양이를 더 좋아한다.
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.
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.
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
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.
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.
초록색을 더 좋아한다.
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
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.
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.
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.
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.
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.
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
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.
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
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.
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 도덕군자들을 더 좋아한다.
지나치게 쉽게 얻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.
민중들의 영토를 더 좋아한다.
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.
만일에 대비하여 뭔가를 비축해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.
정리된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.
신문의 제 1면보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.
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.
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.
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.
책상 서랍들을 더 좋아한다.
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
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.
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(0)를 더 좋아한다.
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.
불운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.
얼마나 남았는지,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.
존재,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
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.
“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‘나는 모르겠어’를 되풀이해야 합니다.
시인은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.
시인은 자신이 쓴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또다시 망설이고, 흔들리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.”
쉼보르스카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 중에서 한 부분입니다.
이 멋진 폴란드 할머니께서 어제 향년 88세로 별세했다는군요. 담배를 무지 사랑했던 분인데 폐암으로 돌아가셨대요.하지만 가족들앞에서 너무도 평안히 여행을 떠나셨다는 군요. ‘시의 모차르트’라고 불렸던 이 분이 타계하자 폴란드는 큰 문화적 손실이라고 애도가 줄을 잇고 있다고 하네요. 영면하소서.
장례식 by 비슬라바 쉼보르스카
"이렇게 갑자기 갈 줄,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?"
"스트레스와 담배를 조심하라고 그렇게 그에게 주의를 주었건만"
"아무튼 고마워"
"이 꽃들, 포장 좀 끌러줘"
"형도 심장병으로 갔는데, 아마 유전인가 봐"
"턱수염을 기르니까 당신인 줄 몰라보겠어요"
"자업자득이지. 언제나 주제넘게 참견하는 것을 좋아했으니 말야"
"카제크는 바르샤바에 있고, 타데크는 외국에 나갔어요"
"딱 한 번 당신이 똑똑하다고 느꼈는데, 그건 때맞춰 우산을 가져왔을 때였어"
"그들 중엔 그래도 그가 제일로 영리했지만,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"
"문간방이라…… 바시카는 동의하지 않을 텐데……"
"물론 그가 옳았어, 하지만 그건 이유가 안 돼"
"문짝을 새로 칠하는 데 얼마가 드는지 알아맞혀봐"
"노른자 두 개, 그리고 설탕 한 스푼"
"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데 왜 주제넘게 끼어들었을까"
"모두 파란색으로 통일해주세요, 그리고 치수는 작은 걸루요"
"다섯 번이나 물었는데,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"
"그래 좋다구,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너도 할 수 있었잖아."
"그녀가 그나마 이런 일자리라도 얻어서 다행이야"
"글쎄, 잘 모르겠는데, 아마 친척인가 보지"
"저 신부는 벨몽도를 꼭 닮았군"
"공동묘지 이쪽으로는 한번도 와본 적이 없었는데"
"일주일 전 꿈에서 그를 보았는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"
"어린 딸은 그다지 못생긴 편은 아니구먼"
"결국 우리들의 인생도 이렇게 끝나고 말겠지"
"미망인께 제 이름으로 애도의 뜻을 전해주세요, 저는 급히 갈 데가 있어서……"
"라틴어로 장례 미사를 할 때가 훨씬 더 장엄하게 느껴졌는데 말야"
"지난 일은 이미 다 물 건너갔는걸"
"안녕히 계세요, 부인"
"우리 어디 가서 맥주나 한잔하죠"
"전화해요, 얘기나 합시다"
"4번 버스, 아니면 12번 버스를 탈 거예요"
"저는 이만 이쪽으로"
"그럼 우린 저쪽으로"